소년이 온다, 한강


제목: 소년이 온다

작가: 한강

출판사: 창비

종이책 초판 1쇄 발행 2014년 5월 19일

전자책 초판 발행 2014년 6월 5일

독서 기간: 12월 3일 ~ 12월 4일

추천인: 손현민, 김민성

소감: 12월 11일에 광주 망월동 5.18 국립묘지를 방문하기 전에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아가야 되겠다 싶어 관련 책들을 수소문했고, 이 책을 제일 먼저 추천받아 읽기 시작했다. 광주 시민들이 겪은 애환이 너무 슬퍼 책 읽는 내내 거의 쉬지 않고 울어야만 했다. 한국사 교과서로 배운 한두 줄의 암기 거리가 아닌, 우리 시대의 비극으로, 그분들이 우리

에게 남기신 거룩한 유산으로 5.18 민주화 운동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인상깊은 구절:

1장: 어린 새

1. 죽은 사람들의 머리맡에서 일렁이는 촛불 하나하나가 고요한 눈동자들처럼 너를 지켜보고 있다.


2.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끗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조심스럽게 네가 물었을 때, 은숙 누나는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대답했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 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3. 그 밤 빽빽이 강당을 메운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문득 둘러보며, 마치 이곳에 집결하기로 약속한 군중 같다고 너는 생각했다. 소리치지도 움직이지도 손을 맞잡지도 않는, 지독한 시취만을 뿜어내는 군중 속을, 너는 장부를 겨드랑이에 끼운 채 빠르게 걸어다녔다.


2장: 검은 숨

1. 꿈속으로 숨을 수 있다면.

아니, 기억 속으로라도.

종례가 유난히 길던 너의 반 복도에서 서성이며 너를 기다리던 작년 여름으로. 네 담임이 앞문으로 나오는 걸 보고 얼른 가방을 고쳐들던 순간으로. 다른 애들은 다 나오는데 네가 안 보여 교실로 들어갔다가, 칠판을 지우고 있는 너를 큰 소리로 부르던 순간으로.


4장: 쇠와 피

1. 내가 함께 올라탄 트럭이 시내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습니다. 우리는 두차례 길을 잘못 들었고, 겨우 도착한 예비군 훈련소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총을 가져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사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가전에서 희생되었는지 난 알지 못합니다. 기억하는 건 다음 날 아침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끝없이 줄을 서 있던 병원들의 입구, 피 묻은 흰 가운에 들것을 들고 폐혀 같은 거리를 빠르게 걷던 의사와 간호사들, 내가 탄 트럭 위로 김에 싼 주먹밥과 물과 딸기를 올려주던 여자들, 함꼐 목청껏 부르던 애국가와 아리랑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2. 재판장님이 입장하십니다.

서기의 말이 떨어지자 앞문이 열리며 법무장교 셋이 차례로 들어왔습니다.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습니다. 앞에서 두번째 줄 정도였습니다. 반쯤 고개를 들고 나는 앞쪽을 살폈습니다. 누군가가 소리 죽여 흐느끼듯 애국가 첫 소절을 부르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린 영재라는 걸 깨달았을 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미 합창이 시작돼 있었습니다. 자력에 이끌린 것처럼 나도 따라 불렀습니다. 죽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우리들이, 땀과 피와 고름이었던 우리들이 조용히 노래하는 동안, 어째서였는지 그들은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소리치지도,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내려치지도, 위협했던 대로 벽으로 몰아 넣어 총살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노래를 끝마칠 때까지, 소절과 소절 사이마다 위태한 침묵이 풀벌레 소리와 함꼐, 간이재판소의 서늘한 공기 속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6장: 꽃 핀 쪽으로

1. 이름만 걸어놓고 얼굴도 한번 안 비쳤던 유족회에 처음 나간 것은, 부회장이란 엄마가 돌린 전화를 받고나서였다이. 그 군인 대통령이 온다고, 그 살인자가 여기로 온다고 해서……. 네 피가 아직 안 말랐는디.

안 그래도 잠을 깊이 못 들고 뒤척이는 날들뿐이었지마는, 그날부터 새로 잠을 못 잤다이. 네 아부지도 잠을 못 자드라마는, 평생 병치레만 하는 순한 양반이라 억지로 떼어놓고 혼자 유족회에 갔다이. 처음 보는 엄마들허고 인사를 허고, 쌀집을 하는 회장네에서 밤늦도록 현수막하고 피켓을 만들고, 모자란 것은 각자 집에 가서 더 만들어오기로 하고 헤어졌다이. 헤어질 적에 손을 잡는디, 그 차갑든 살…… 암것도 속에 없는 허재비 같은 손을 맞잡고, 허재비 같은 등을 서로 문지름스로 얼굴을 들여다봤다이. 얼굴 속에도 암것도 없고, 눈 속에도 암것도 없는 우리들이 내일 보자는 인사를 했다이.

무섭지 않았어야.

죽어도 좋다는 마음인디, 무서울 것이 어디 있겄냐. 다 같이 소복을 입고 그 살인자가 탄 승용차가 오기를 기다렸다이. 정말로 아침 일찍 그놈이 나타났다이. 소리를 맞춰서 구호를 외칠라던 계획은 엉망이 됐다이. 다들 울부짖고 졸도하고, 머리는 헝클어지고 소복은 찢어졌다이. 현수막은 펼쳤다가 바로 뺏겼다이. 경찰서에 다 같이 끌려가 넋을 잃고 앉아 있는디, 우리하고 다른 곳에서 시위하기로 했던 부상자회 청년들이 잡혀들어왔다이. 시무룩이 줄을 서서 들어오다가 우리하고 눈이 마주쳤는디, 한 청년이 갑자기 울면서 소리쳤다이.

엄마들, 여기서 왜 이러고 있소? 엄마들이 무슨 죄를 지었소?

그 순간 내 머릿속이 멍해졌어야. 하얗게, 온 세상이 하얗게 보였어야. 찢어진 소복 치마를 걷고 탁자 위로 올라갔다이. 더듬더듬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렸어야.

맞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단가.

날개가 달린 것같이 형사들 책상 위를 겅중겅중 건너갔다이. 벽에 걸린 살인자 사진을 끌어내렸다이. 밟아 부순게 발에 유리가 박혔다이. 눈물이 흐르는지도 피가 튀는지도 몰랐다이.

발에서 피가 솟은게 형사들이 나를 병원으로 싣고 가더라야. 느이 아부지가 연락받고 응급실로 왔어야. 의사하고 간호사가 내 발바닥을 갈라서 유리 조각을 뽑고 붕대를 감는디 내가 느이 아부지한테 부탁했다이. 집에 좀 댕겨오소. 어젯밤에 만들어놓고 안 가져온 현수막 하나가 농 속에 있소.

그날 해 질 녘에 느이 아부지 어깨를 짚고 절름절름 옥상에 올라갔다이. 난간에 기대서서 현수막을 길게 내리고 소리 질렀다이. 내 아들을 살려내라아. 살인마 전두환을 찢어죽이자아. 정수리까지 피가 뜨거워지게 소리 질렀다이. 경찰들이 비상계단으로 올라올 때까지, 나를 들쳐메고서 입원실 침대에 던져놓을 때까지 그렇게 소리 질렀다이.


에필로그: 눈 덮인 램프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피 흘리는 사람을 업어다 병원 앞에 내려놓고 황급히 달아난 공수부대원이 있었다. 집단발포 명령이 떨어졌을 떄, 사람을 맞히지 않기 위해 총신을 올려 쏜 병사들이 있었다. 도청 앞의 시신들 앞에서 대열을 정비해 군가를 합창할 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 외신 카메라에 포착된 병사가 있었다.

어딘가 흡사한 태도가 도청에 남은 시민군들에게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을 받기만 했을 뿐 쏘지 못했다. 패배할 것을 알면서 왜 남았느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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