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터스쿨 지영이에게.
반가워요. 동생 표현을 빌려 쓰자면 나는 유린쓰라 해요. 아마 동생은 내가 누군지 모르겠죠. 하지만 놀라지 마세요. 어제저녁을 먹고 2층을 걷다 편지 한 장을 주웠는데, 우연히도 불행히도 그 편지가 바로 동생 편지였던 거죠. 화정이와 나영이가 그 편지를 읽었으면 좋으련만, 나는 잘 모르겠네요. 동생이 혹시 실망할까 싶어 외박 나가는 남자아이 틈에 이 편지를 끼워 보네요.
바깥세상은 어떤가요. 이 편지를 받아 읽고 있을 즈음이면 비가 한 번 정도는, 더 운 좋은 날이면 눈도 한 번 정도는 내렸을 테죠. 나는 매년 눈이 세차게 올 때마다 눈사람을 만들곤 해서 올해 또한 이곳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과 예쁜 눈사람을 만들려 했는데 선생님들께서 못하게 막아 안타까웠었죠.
동생 편지를 유심히(; 미안해요) 읽어보니 아직 중3인 것 같군요. 또, 친구들과 산책도 수다도 좋아하는 것 같구요. 나이만 다를 뿐 나도 그래요. 밥 먹을 때도, 숙제할 때도, 언제나 친구들과 얘기하고 싶어지고, 한번 시작하면 봇물 터지듯 끝없이 쏟아내죠. 이것은 비단 나만의 즐거움일 뿐만 아니라 모두의 즐거움일 테죠.
재훈이와 준용이를 좋아하나 봐요. 어떤 점이 좋은지 궁금하네요. 사진이라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동생도 알다시피 이곳에서는 인터넷을 할 수 없죠. 그저 동생 이름 석 자와 우연히 읽게 된 편지 한 장으로 동생의 얼굴과 동생이 좋아하는 것들을 상상해 볼 뿐이에요. 나는 파스타를 좋아해요. 봉골레도 좋고 까르보나라도 무척 좋아해요. 친구들과 한참 수다 떨며 먹다 보면 어느새 접시는 비어 있고, 그리고 우리는 딸기 케이크나 (; 가끔 초콜릿도 먹어요) 슈크림 빵을 먹으러 가죠. 달달한 케이크나 슈크림 그리고 라떼나 모카 한 잔을 같이 마시면 또 뭐가 더 부러울 수 있을까요. 아, 친구들이 보고 싶어요. 파스타도, 케이크도, 슈크림도 그리워요. 동생은 밖에서 이 모든 것을 먹을 수 있겠죠. 참 부러워요. 앞으로 맛있는 것을 먹을 때면, 내 생각도 한 번씩 꼭 해주길 바라요.
지영이는 지난 한 달 동안 잘 견디고 열심히 해서(; 그랬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참 예쁘고 착해요. 지영이가 노력한 만큼, 혹은 그 이상의 보상이 반드시 주어질 것이에요. 언제 어디서든 힘내요. 감기도 조심하구요. 매일 말로서 응원하고 속으로도 기도할게요. 편지 보내고 싶으면 보내주세요. 안 그래도 따분하고 심심한데 손편지 하나 제대로 못 써줄까요.
그럼, 잘 지내요. 안녕.
2월 1일 2015년
오전 9시 일요일
편지 속의 동생을 생각하며, 인문 손유린
윈터스쿨 애들이 쓰던 교실을 산책하다 우연히 그네들의 편지를 주웠고
그 편지를 가지고 어떤 장난을 할까 고민하다가 '그 편지의 주인에게 여자인척 편지 보내서 답장받기'를 하기로 했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여자였던 적이 없어서
여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어떨까 궁금하기도 하고
춘향유문(春香遺文)의 서정주 시인처럼 나도 수려한 여성 화자를 갖고 싶었다.
그래서 연습삼아 이렇게 여자인척 편지를 썼고, 외박 나가는 룸메이트에게 대신 편지 부쳐달라 부탁했지만
시간이 안 맞아 부치질 못했고 그렇게 전하지 못한 편지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