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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 1, 야마오카 소하치
제목: 대망 1
작가: 야마오카 소하치
출판사: 동서문화사
초판 1쇄: 1970년 4월 1일
2판 1쇄: 2005년 4월 1일
2판 14쇄: 2012년 3월 1일
독서 기간: 12월 13일 ~ 12월 16일
추천인:
소감:
인상 깊은 구절:
제 4장: 봄볕
1. "오, 또 꾀꼬리가 우는군. 유리, 고자사. 들었느냐?"
"네."
두 사람은 귀를 기울였다.
"지불당(持佛堂) 성벽 밖에서 우는가 봅니다."
"그래, 그 언저리인 것 같아……. 저 꾀꼬리는 어째서 저 담장 밖에 오는 것일까?"
"매화가 만발해 있기 때문이겠지요."
"유리-"
"네, 마님?"
"너는 매화가 꾀꼬리를 부르는 것을 보았느냐?"
유리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 매화는 그저 가만히 피어 있을 뿐……. 꾀꼬리를 부르지는 않아. 오다이도……."
그리고는 천진스럽게 고개를 갸웃했다.
"웃어도 괜찮겠지, 응, 유리?"
"마님."
2. 상대의 불행을 기뻐하는 오히사와, 마음을 비운 슬기로움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오다이의 슬픔이 히로타다의 가슴에 아름다움과 추한 그늘을 선명하게 만들어갔다.
3. 유리와 스가가 놀라며 그를 맞았으나 히로타다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침실로 들어갔다.
"다이!"
불러놓고 히로타다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하얀 이불깃 속에서 검은 머리만이 내다보이고 그것이 세차게 물결치고 있다. 아직 14살 밖에 안 되는 소녀였다.
"다이……."
히로타다는 그 머리맡에 살며시 몸을 굽히고 말했다.
"용서해라, 내가 나빴어."
별안간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히로타다는……. 술버릇이 나쁜 모양이야. 앞으로는 삼가도록 하지, 용서하라."
이불이 더 한층 세차게 떨리더니 거기서 살며시 오다이의 얼굴이 내다보였다. 눈언저리가 젖어 있다. 입매는 감정을 억누르려는 의지로 슬프게 일그러져 있었다.
"울지 마, 이제 그만 울어."
"네…… 네."
"내가 나빴어, 울지마."
이 대화는 옆방에 있는 유라와 스가에게도 손에 잡힐 듯 들렸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았다.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발그레 볼을 물들이며 즐거운 미소로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봄볕이 마침내 꽃을 품은 모양이다…….
제 7장: 덫과 덫
일그러진 시대는 그대로 일그러진 사람을 만든다. 이미 혈육의 살상을 도리에 어긋나는 일로 여기지 않는 난세였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온갖 모략이 필요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루의 양식을 위해 허덕이는 농민이나 영주나 모두 평등했다. 그처럼 역사상 보기드문 난세에 태어난 것이다. 오다 편에 붙는 게 살아남는 길이라고 믿는 노부모토로서는, 만일 오다 쪽에 가담하기로 결정되면 자기를 벨지도 모르는 아우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베지 않으면 안될 존재일 수 밖에 없었다.
제 9장: 아즈키 고개
"기원 하자. 올해는 범해야. 범처럼 늠름하고 강한 자식을 점지해 주십사고 신불에게 기원하자. 내 자식에게는 이토록 분한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아……."
"네……."
"이마가와에 의지하지 않고, 오다에게 굴하지 않고 혼자서 유유히 천하를 걸어갈 수 있는 자식……."
히로타다는 자신에게 부족한 꿈을 그리며 마침내 오다이의 손을 잡았다.
'이 싸움에서 어쩌면 전사할지도 모른다…….'
이마가와가 이기든, 오다가 그것을 물리치든 히로타다는 그 나름대로 무인의 기개를 보여주어야 했다. '죽음'은 결코 공상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자신의 어깨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히로타다는 자신의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오다이의 몸에 애절한 정을 느끼며 아무 거리낌 없이 오다이의 목덜미에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오다이…… 부탁해. 이 히로타다에게 만약의 일이 생기더라도…… 당신은 반드시 살아줘. 태어나는 자식을 위해 살아야 해."
뜨거운 목소리로 속삭인 다음, 도톰한 오다이의 귓볼에 입술을 가져갔다. 오다이 역시 소리내어 울음을 터뜨리며 히로타다에게 안겨들었다. 이런 때 우는 것이 히로타다의 마음을 얼마나 약하게 만드는 일인지 알면서도 억누를 수 없는 커다란 감정의 물결이 밀려들었다.
제 16장: 전국(戰國) 부부
오다이의 흐느낌이 높아지자 히로타다는 무엇에 홀린 듯 말이 빨라졌다.
"왜 이리 알아듣지 못하나? 이 히로타다는 그대보다 더 슬퍼. 그러니 참아줘! 아무튼 뜻대로 안되는 게 뜬세상 일이야. 오늘이 이 세상에서의 이별이 될지도 모르겠어. 그렇지, 이별이 될 거야. 그러나 내세가 있잖아. 저 세상이라는 곳이 있잖아. 그대가 없어지면 내 건강은 오래 가지 못하겠지. 하지만 죽은 뒤 극락이라는 연꽃받침 위에서 그대를 기다리고 있겠어."
제 18장: 별리(別籬)
"이유를 말하지 않고는 안되겠군요. 그럼, 들어보세요."
"……."
"가리야의 오빠에 대해서는 여러분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어요. 조급하고 거친 성품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정도면 내 마음을 헤아려주시겠지요."
"……."
"여러분에게 만일의 일이 생긴다면 다케치요가 자란 뒤 매정한 어머니였다고 내가 원망받게 될 거예요. 그토록 뛰어난 무공을 지닌 사람들을 일시적인 슬픔에 사로잡혀 적지로 끌고 가 비참하게 목숨잃게 한 못난 어미였다는 소리를 듣게 돼요."
번쩍 정신이 든 듯 가네다가 얼굴을 들고 모두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돌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오다이는 살그머니 눈시울을 눌렀다.
"조심은 미리 해야 하는 것……. 이것은 아버님이신, 다다마사님의 가르침이었어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다케치요와 노부모토님은 외삼촌과 조카, 그 사이에 원한의 씨앗을 남기지 않도록 하는 게 나의 소임이라고 생각해요. 부탁이에요! 다케치요의 앞날을 위해 부디 돌아가주세요."
갑자기 남자들의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의 어깨와 삿갓이 잔물결을 일으키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카이가 쥐어짜는 듯한 소리를 냈다.
"마님! 17살 나신 마님 앞에 부끄럽습니다……. 이 나이에 얼마나 어리석은지……. 그렇습니다. 성에는 우리의 소중한 다케치요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 돌아갑시다. 돌아가서 오늘 마님께서 말씀하신 이 훈계를 잊지 맙시다."
오다이의 가마는 아베 사다지가 불러온 농부 손에 맡겨졌다. 오다이의 재촉을 받고 오카자키의 중신들은 돌아보고 또 뒤돌아보며 성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오다이는 가마를 메게 했다. 비로소 온몸을 죄어오는 고독에 흐느껴우는 소리가 가마 밖까지 새어나왔다.
오다이의 언니 히로이에 부인은 이런 배려를 하지 못하여 그녀를 전송한 16명의 호송자는 노부모토에게 하나도 남김없이 살해되었다.
하늘에 한 조각의 구름도 없는 날에…….
제 25장: 붉은 단풍
여기까지 말하고 셋사이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문득 뜰의 녹음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 녹음 속에 단 한 그루 붉은 단풍이 섞여 있지요?"
게요인은 의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거기에는 새싹 때부터 붉은 날개를 펼친 것처럼 새빨갛던 단풍잎의 붉은 색이 뚜렷이 눈에 어려보였다.
"저 단풍은 여름동안 모든 잎사귀 가운데 오직 홀로 붉은빛을 띠고 있었소. 다른 파란 잎들은 어째서 붉은색 단풍나뭇잎만 빨간 것일까 하고 웃고 있을지도 모르오. 허지만 때가 오면 주위의 나무들이 붉게 물들어 단풍나무도 언젠가 붉은색 속에 묻히게 되오. 그러면 어느 것이 단풍나무였는지 구별도 안되는 채 잊혀지고, 오히려 붉은색이 덜하다고 나무람받을지도 모르오. 나는 저 단풍이 되고 싶소! 그리고 단풍의 마음을 이어받은 무장을 얻고 싶소! 스님, 그것이 이 셋사이가 작은 안조 성에 집착하고 오카자키 가문에 특히 냉혹한 이유요. 아시겠소?"
제 30장: 서로 다가서는 자
"산노스케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다케치요가 다 먹으면 자기 몫이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겠지."
다케치요는 눈도 깜빡이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도쿠치요는 다케치요가 혼자서 다 먹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다케치요를 믿고 있었다. 즉 신(信)이 있었기 때문에 다케치요가 먹지 않으면 먹지 않으려고 했지……."
셋사이는 여기서 말을 끊고 자신의 눈빛이 다케치요의 나이를 잊고 엄격하게 변해가는 것을 의식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산노스케 역시 다케치요를 빋게 됐다. 잠자코 있어도 혼자서 다 먹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산노스케는 도쿠치요의 흉내를 낸 게 아니라 다케치요를 믿고 도쿠치요를 믿은 것이다. 알겠느냐? 신(信)이 있었기 때문에 그 얼마 안되는 식(食)이 살아나 세 사람의 목숨을 이을 수 있었던 거란다. 그런데 그 신(信)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셋사이는 여기서 다시 눈빛을 부드럽게 바꿨다.
"도쿠치요가 혼자 다 먹는다면 나머지 두 사람은 굶주리게 된다. 다케치요가 혼자 먹어도, 산놋케가 혼자 먹어도 마찬가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신이 없어지면, 세 사람 모두 굶주림을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그 식(食)이 싸움의 씨가 되어 오히려 피투성이 칼싸움으로 끌어들일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말했을 때 다케치요가 무릎을 탁 쳤다. 어느새 몸을 책상 위로 쑥 내밀고 눈을 보름달처럼 크게 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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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3, 박세길
제목: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
작가: 박세길
출판사: 돌베개
신판 초판 1쇄: 2015년 7월 20일
신판 초판 2쇄: 2016년 3월 18일
독서 기간:12월 9일 ~ 12월 10일
추천인: 김효진 선생님
소감:12월 11일에 광주 망월동 5.18 국립묘지를 방문하기 전에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아가야 되겠다 싶어 관련 책들을 수소문했고, 김효진 선생님께서 추천해 주셔서 읽게 되었다. 한국사 교과서로 배운 한두 줄의 암기 거리가 아닌, 우리 시대의 비극으로, 그분들이 우리에게 남기신 거룩한 유산으로 5.18 민주화 운동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인상 깊은 구절:
제 6부: 항쟁의 불꽃
제 1장: 독재와 민주의 갈림길
제 1번: 군부의 재등장
1. 우리가 5.16쿠테타와 관련해 살펴보았듯이 한국에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일차적인 조건은 미국의 지지였다. 특히 미국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 있는 군부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전두환 1은 바로 이 점에서도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었다.
우선 전두환은 미국 측이 마음 놓고 믿을 만한 열렬한 친미파였다. 아울러 전두환 자신 역시 일찌감치 권력에 대한 야욕을 가지면서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각별한 신경을 써왔다. (p. 15)
2. 널리 알려진 대로 위컴 2과 전두환은 특전부대 장교 출신으로 베트남전에서 함께 작전을 수행하며 깊은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p. 16)
3. 아시아통으로 알려진 『뉴욕타임스』의 R. 헤롤런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12.12쿠테타 직후 주한 미군의 고관들이 정승화 3 직속 부하들에게 "역쿠테타를 해서는 안 된다"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p. 19)
4. 즉, 미국은 전두환 일파를 적극 옹호하면서 아울러 군부 내에서 전두환 일파에 반항할 가능성을 적극 봉쇄하는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p. 19)
5. 최규하 정부를 축출하고 일거에 정치권력까지 잡을 경우 박정희의 18년 독재에 강한 혐오감을 민중의 저항이 폭발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18년에 걸친 박정희 군부독재는 우리 민중에게 군부독재에 대한 깊은 혐오감을 심어놓았다. 역설적이지만 박정희 군부독재가 역사에 기여한 점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이다. 이 같은 박정희의 유산을 딛고 권력을 장악하자면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따. 별 수 없이 전두환 일파는 좀 더디지만 확실한 길을 택하기로 했다. 그 결과 이들이 완전히 권력을 손에 넣기까지는 약 8개월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는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 걸릴 쿠테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p. 20)
6. 전두환 일파는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다음에 나오는 세 가지 음모를 추진했다.
첫째, 민주적 개헌을 저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둘쨰, 여론을 조작해 일반 민중 사이에서 '정국 안정을 책임질 수 있는 강력한 정부'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각계각층에 치밀한 정치공작을 전개했는데, 그 가운데 '언론조종반'이라는 것이 있었다. 언론조종반은 우선적으로 언론계의 중진들을 만나 회유공작을 실시하는 한편 보도검열단으로 하여금 조속한 민주개헌이나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는 야당, 재야, 학생운동에 대한 보도를 삭제하거나 이들의 행동이 안정을 깨뜨리는 폭력/파괴행위로 보도되도록 만들었다. 또 북한의 위협이 거듭 강조되면서 이대로 가다가는 송두리째 망해버리겠다는 위기감이 조성되었다.
셋쨰, 예상되는 저항을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군대를 준비하고 훈련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실시된 것이 이른바 '충정훈련'이었다. 충전훈련은 쉽게 '폭동진압훈련'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민중의 혈세로 유지되는 군대를 동원해 자기 부모형제의 가슴에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쏘도록 하는 야만적 훈련이었다. (p. 21)
제 2번: 대열을 정비하는 민주 진영
1. YMCA 위장결혼식 사건은 비록 참석자들 모두가 군부쿠테타의 음모를 정확히 간파한 것은 아니었지만, 독재자 박정희가 사망한 후에도 유신체제를 떠받치던 세력이 엄연히 버티고 있으며, 그들이 유신체제의 부활 음모를 꾀하고 있음을 세상에 알린 사실상 최초의 투쟁이었다. (p. 24)
2. 학원민주화투쟁에는 광범위한 학생들의 참여가 있었으며, 일부 어용교수 퇴진과 학칙 개정 등 눈에 보이는 성과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투쟁을 통해 광범위한 학생들이 투쟁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p. 26)
3. 이렇듯 대학가는 비교적 빠른 시일 안에 군부와 대결할 수 있는 대결을 갖출 수 있었다. 대학가의 경우 오랜 기간에 걸친 반독재투쟁을 통해 다양한 경험과 자신감을 터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동현장은 사정이 달랐다. 노동자들은 그동안 완전한 무권리상태에서 짓눌리고 뺴앗기면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아왔다. 노동자들의 처절한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권력의 잔혹한 탄압에 직면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권력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p. 27)
4. 노동부가 집계한 자료를 보더라도 1980년 5.17쿠테타 이전에 발생한 노동쟁의는 무려 2,168건에 이르렀다. 양적 규모도 컸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은 필요하다고 느끼면 파업/농성 등 적극적인 투쟁을 벌임으로써 요구사항의 대부분을 달성할 수 있었다. 특히 4월 8일부터 10여 일간에 걸쳐 언론과 민중의 비상한 관심을 받으며 진행된 청계피복노동조합의 농성투쟁은 마침 내 29퍼센트의 임금인상을 쟁취함으로써 노동자들의 투쟁에 커다란 활력을 불어넣어주었다. (p. 28)
제 3번: 대격돌
1. 유신시대에 야권을 이끌던 두 지도자인 김영삼/김대중 씨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동의 적이었던 박정희가 사라지자 이들은 서로 권력을 차지하려고 끝내 갈라서고 말았다. (p. 33)
2. 5월 15일, 투쟁은 한결 규모가 확대되고 그 범위 또한 확산되었다. 이날 서울에서만도 대학생 10여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지방에 있는 26개 대학이 동시에 투쟁의 포문을 열었다. 서울의 대학생들은 14일에 벌인 시위와는 달리 서울역 광장에 집결해 연좌농성을 벌이면서 전두환 일파와 최규하 정부를 규탄했다. 그 주위를 에워싼 시민은 줄잡아 30만 명이었다. (p. 37)
3. 시위 학생들에 대한 인근 시민의 반응은 매우 적극적이었다. 행진하는 학생들의 머리 위로 빵과 휴지와 수건이 날아들었고 지갑을 털어 학생들에게 밥을 사 먹이는 시민도 무수히 많았다. 병원에서는 시위 중에 터진 머리를 무료로 꿰매주고 민가에서는 쫓기는 학생들을 숨겨주었다. (p. 38)
4. 군부는 학생시위의 열기가 높았을 때에는 몹시 긴장해 있었다. 그들은 학생들의 투쟁열기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고, 휴교령조차 내리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5.17쿠테타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서울역 회군'을 통해 군부가 학생들의 약점을 간파하면서부터다. 따라서 5.17쿠테타를 허용했던 것은 학생들의 대대적인 가두진출이 아니라 어이없는 퇴각이었다고 볼 수 있다. (p. 42)
5. 그러나 이 같은 시대적 한계를 온몸으로 뛰어넘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죽어가는 역사를 되살리고, 나아가 거대한 역사의 전진을 이룩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아니 뜨거운 피로써 이 어려운 일을 해냈다. 그들은 이름 없는 이 땅의 민중이었다. 바로 여기서 '항쟁의 도시 광주'가 역사의 무대 위에 오르게 된다. (p. 43)
제 2장: 광주민중항쟁
제 1번: 피로 물드는 광주
1. '휴교 시에는 오전 10시 학교 정문 앞'이라는 행동지침을 따르는 학생들이 전담대 정문 앞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물론 특별히 지도부라 할 만한 것은 없었다. 10시가 조금 넘자 약 2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이 용감한 학생들은 수가 늘어나자 힘을 얻어 공수부대의 학교 점령을 비난하면서 구호를 외쳤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공수부대 물러가라!"
번뜩이는 총칼 앞에서의 이 당돌한 외침은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남한 전역을 통틀어 군사쿠테타에 항거했던 유일한, 그러나 힘 있는 포효였다. 이는 분명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는 한줄기 빛이었다. (p. 45)
2. 그러나 전두환 일파는 18일 광주 학생시위를 각별한 눈으로 지켜 보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광주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총칼에 대한 두려움으로 잔뜩 겁을 집어먹고 움츠러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터져나온 광주의 시위는, 총칼의 위협 앞에서도 쉽게 굴복하지 않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전두환 일파에게는 위협적인 요소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만약 광주에서 일어난 시위를 조기에 진압하지 못한다면 다른 지역에서도 자신감을 회복해 군부쿠테타에 대한 저항에 나설 것이 틀림없었다. (p. 46)
3. 광주가 어떤 도시인가. 광주는 박정희 독재시대에 극단적인 지역차별정책을 받아온 호남의 중심지였다. 호남은 개발 우선순위에서 항상 밀려났고 호남인은 실력에 관계없이 출신지역이 문제돼 사회활동에서도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했다. 광주 사람들은 이 같은 차별정책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왔고, 그 결과 군부독재에 대한 원한이 뼛속 깊숙이 박혀 있었다. (p. 49)
4. 전옥주, 차명숙 씨 등 애국적인 여성들이 앰프를 차에 싣고 광주 시내를 돌면서 시민들의 용기를 북돋았다. 이렇게 하여 시민들의 사기는 갈수록 높아지고 그 힘 또한 놀라울 정도로 강화되어갔다. (p. 53)
5. 오후 6시경, 무등경기장을 떠난 차량 200여 대가 요란한 경적과 함께 일사분란한 대오로 도청을 향해 진격했다. 그 뒤로 시민들이 거대한 물결을 이루며 행진했다. 한마디로 민중의 위대한 힘이 연출되는 장엄한 순간이었다. (p. 53)
제 2번: 마침내 무장항쟁으로
1. 5월 21일 현재 인구 73만의 광주에 투입된 병력은 3개 공수여단과 20사단을 합쳐 자그마치 2만에 육박하는 대부대였다. (p. 55)
2. 차량을 조달하기 위해 시위대의 일부가 아세아자동차 공장으로 몰려가자 그곳 노동자들이 장갑차와 차량 56대를 선뜻 내주었고 일부는 시위에도 합류했다. 이렇게 하여 전날보다 강력해진 차량시위대가 형성되자 이들을 앞세운 10만이상의 시민들이 금남로로, 도청으로 진격했다. 도청 앞 공수부대와 30여 미터 간격을 두고 시민들의 항의집회가 시작되었다. 이때가 오전 10시경. (p. 56)
3. 오후 1시 정각이었다. 느닷없이 <애국가>가 연주되면서 일제히 사격이 시작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이 '엎드려 쏴' 자세로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근처의 전일빌딩, 상무관, 도청, 수협 전남도지부 건물의 옥상에서 저격병들이 시위대열 선두에 있는 주동자들을 겨냥해 사격을 실시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격은 메가폰으로 사격중지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약 10분간 계속되었다.
금남로는 피바다를 이루었다. 시민들로 가득 찼던 거리는 순식간에 적막으로 뒤덮였고, 죽은 이들의 피와 부상자들의 신음만이 금남로의 공백을 메우고 있었다. 아우성치는 부상자들을 구하기 위해 용감한 사람들이 거리로 뛰어나왔지만 그들도 저격병의 표적이 되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태 앞에 넋을 잃고 분노와 공포감에 몸을 떨던 1시 30분경, 한 대의 장갑차가 텅 빈 금남로를 가로지르며 도청을 향해 질주했다. 상의를 벗고 이마에 흰 띠를 두른 청년 한 사람이 장갑차 위로 상체를 드러낸 채 태극기를 흔들며 절규하고 있었다. 그는 외쳤다.
"광주 만세!"
그 순간 청년의 몸은 공수부대의 총탄에 붉은 피로 물들었고, 주인 잃은 장갑차는 화순 방면 도로를 따라 사라졌다. (p. 57)
4. 옥상의 저격수들은 주변 건물의 창으로 이 광경을 내다보는 사람들에게도 총격을 퍼부었다. (p. 58)
5.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수많은 시민이 헌혈하기 위해 각 병원으로 달려왔다. 그러고는 끝이 보이지 않는 헌혈 대열에서 순서를 기다렸다. 그중에는 술집 골목이 즐비한 황금동에서 찾아온 아가씨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p. 60)
6. 한참 후 전열을 재정비한 시민군은 도청으로 진격해 비로소 공수부대가 철수했음을 확인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감격에 겨워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렸다. 희생자의 고통에 찬 울부짖음 위로 해방을 맞이하는 시민의 환호 소리가 온 광주 시내를 뒤덮었다. (p. 62)
7. 목포 시민들은 23일 5만 명이 참석해 '민주헌정 수립을 위한 목포 시민 궐기대회'를 개최하는 등 광주민중항쟁의 마지막 순간까지 투쟁을 함께했다. (p. 63)
제 3번: 해방 광주
1. 누구든지 시민군을 아군이라 부르는 데 서슴지 않았다. 아낙네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시위차량을 불러 세우고 주먹밥과 김밥을 부지런히 올려 주었다. 그들은 시민군 청년들이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한 얼굴로 "어떻게 싸웠느냐, 다치지는 않았느냐"묻곤 했는데, 시민군들은 자랑스럽게 자신들의 무용담을 말했다. 어떤 아넥네는 물통을 들고 나와 그들의 얼룩진 얼굴을 닦아주고 등을 다독거리며 격려하기도 했다. 모두들 자식이나 동생 같은 사람들이었다. 약국 앞을 지날 때에는 약사들이 피로회복제와 드링크제를 한두 박스씩 차량에 올려주었고, 시민군이 이제 많이 먹어서 필요 없다고 거절해도 다른 동료들에게 나눠주라고 기어코 올려놓기도 했다. 골목 어귀의 슈퍼마켓이나 가게에서는 담배도 몇 보루씩 차 위에다 올려주었다. 그러나 아무 곳에서도 술을 주고 받지 않았는데, 시민군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술을 마시거나 취한 경우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p. 64)
2. 광주 시민은 매점매석을 방지함으로써 제한된 생필품을 최대한 활용했다. 쌀집에서는 한꺼번에 두 되 이상의 쌀을 팔지 않았고, 담배 가게 주인은 한 사람에게 한 갑씩만 담배를 팔았다. 슈퍼마켓이나 식료품점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것을 그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두가 알아서 자발적으로 지켰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기간에 평소 흔히 있던 강도나 절도 등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와 함께 시민군과 학생이 주축이 되어 시내 치안과 경비를 맡았다. 교통 역시 시민군이 확보한 차량을 동원해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해결했다.
이로써 광주 시민은 인간이 투쟁을 통해 얼마나 고결해질 수 있는지를, 우리 민중이 얼마만큼 성숙된 자치능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p. 65)
3. 시민들의 투쟁의식을 유지/발전시키고, 상황을 올바로 인식시키기 위해 노력을 집중했다. 그 결과 그동안 분산적으로 이루어지던 각각의 홍보활동을 하나로 통합해 소식지 『투사회보』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p. 69)
4. 전옥주, 차명숙 씨가 중심이 된 가두방송조 역시 맹렬한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시민들의 투쟁의식을 고취했다. (p. 69)
5. 오후 3시경 드디어 광주 지역 청년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10만이 넘는 시민들의 열기를 모아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열었다.
희생자를 기리는 묵념과 <애국가>를 필두로 대회가 시작되었다. 노동자, 농민, 시민, 학생, 주부 등 그야말로 각계각층의 대표들이 단상에 올라와 각종 성명서와 결의문을 낭독하고 신군부의 야욕과 만행을 규탄하면서 '끝까지 싸워서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라고 역설 했다. 이날 사회를 본 김태종(전남대 4학년) 씨가 "이 나라 민주주의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를 흘리고 싸워서 쟁취하는 것입니다"라고 열변을 토하자 시민들은 광장이 떠나갈 듯한 환호와 박수로 투쟁의 결의를 표시했다. 만세삼창으로 궐기대회가 끝났지만 시민들은 광장을 떠나지 않았다. 10여 명의 고등학생들이 친구의 시신이 든 관을 태극기로 덮고 <애국가>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운구행진을 시작하자 시민들은 오열을 터뜨렸다. (p. 70)
제 4번: 죽음을 딛고
1. 광주와 연결된 모든 교통망이 완전히 봉쇄되고 말았다. 그럼으로써 광주는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하는 바다 위에 떠있는 한 점의 섬과도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광주를 봉쇄하고 있던 군부대는 광주를 왕래하는 사람을 보면 이유를 막론하고 처단했다. 그 결과 무수한 양민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p. 72)
2. 미 국방성 대변인 토머스 로스가 "존 위컴 주한 유엔군 및 한미연합군 사령관은 그의 작전지휘권 아래 있는 일부 한국군을 군중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한국 정부의 요청을 받고 이에 동의했다"라고 밝힌 것이 5월 22일이었다. 그러니까 미국 역시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기다리지 않고 무력에 의한 진압방침을 일찌감치 결정해버린 것이다. 미국은 20사단의 광주 투입을 승인함과 아울러 오키나와에 있는 조기경보기 2대와 필리핀 수빅 만에 정박 중인 항공모함 코럴시 호를 한국 근해에 출동시켰다. 이는 전두환 일파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지지 표명임과 동시에 전체 한국 민중에 대한 무력시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조치는 당연히 워싱턴에 있는 최고 정책결정기관의 결정을 거친 것이다. 정확히 말해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기관은 국방성, 국무성, 국가안보회의 저액위원회였다.(p. 74)
3. 마지막 결전을 함께할 사람을 선정했다. 150여 명의 지원자 중 80여 명이 군 제대자였고 10여 명이 여학생, 나머지 60여 명은 고등학생이거나 군대 경험이 없는 청년들이었다. (p. 77)
4. 밤 10시에 항쟁 지도부의 한 사람이 항쟁과정에 동참했던 아내를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최후의 작별을 했다. 그의 아내는 시민군들이 보는 데서 껴안을 수도 안길 수도 없고, 차마 목까지 차오르는 울음을 내뱉을 수도 없어 그의 팔에 머리를 기대고 낮게 흐느꼈다.
또다시 하루가 가고 항쟁 10일째이자 마지막 날인 27일이 되었다. 새벽 2시를 전후해 어둠이 짙게 깔린 광주 시내에는 여학생(박영순, 당시 숭의여전 2학년) 한 명이 처절하게 마지막 가두방송을 하고 있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일어나서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때 거의 모든 광주 시민은 깨어 있었다. 그 순간 애절한 그 여학생의 목소리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광주 시민의 가슴속에 박혀왔다. 이 순간의 강렬한 느낌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어느덧 어둠과 정적뿐인 거리 저편으로 가두방송이 이어질 듯 끊어질 듯하면서 차츰 멀어져갔다. (p. 77)
5. 급박한 순간에 도청 상황실에서는 자폭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한 청년이 주먹으로 눈물을 씻으며 말했다. "고등학생들은 먼저 총을 버리고 투항해라. 우리야 사살되거나 다행히 살아남는다 해도 잡혀 죽겠지만, 여기 있는 고등학생들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산 사람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빛나는 미래를 위해, 항쟁의 마지막을 자폭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자, 고등학생들은 먼저 나가라." 청년의 눈빛이 번득였다. 장내는 숙연해졌고 수류탄을 움켜쥐고 있던 고등학생들은 흐느껴 울었다. (p. 78)
6. 광주민중항쟁은
첫째, 미국과 군부독재가 권력유지를 위해서라면 대량학살을 서슴지 않는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둘째, 군부독재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결사항전의 정신을 불러일으켰다. 20여 년 전 5.16 쿠테타 당시 우리 민중은 총칼의 위협 앞에 맥없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로부터 우리 민중은 군부독재의 폭력 아래 굴종의 나날을 보냈다. 바로 얼마 전 5.17군사쿠테타를 눈앞에 두고서도 대다수 민중은 군대 투입의 위협에 그만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려야만 했다.
이 지겨운 굴종의 시대는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엄청난 피흘림을 대가(너무나 값비싼!)로 치르고나서야 끝내 자신을 마감할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우리 민중은 광주에서의 피의 항쟁을 목도하면서 비로소 고통스러운 참회에 젖어들었고, 그리하여 총칼의 위협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고 또한 필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셋째, 민중의 자치능력을 입증했다. 해방 광주, 그것은 기존의 낡은 질서가 무너진 속에서 미중 자신들의 손으로 창조되고 유지되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 감격의 순간이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지배 질서가 붕괴되면 오직 혼란만 존재한다는, 통치자들의 교설이 갖는 기만성이 낱낱이 폭로되었다. (p. 80)
7. 광주민중항쟁은 그 어둠을 몰아낼 수많은 저항의 불씨를 우리 민중의 가슴속에 뿌려놓았다. 그 불씨는 조금씩 지펴지기 시작했다. 광주 민중의 결사항전 정신을 가슴에 보듬은 채 학생들은 투쟁의 돌파구를 열어나갔고, 노동자와 농민들은 각자 자기 영역에서 투쟁의 터전을 일구었다. 그리하여 저항의 불씨는 서서히 타오르는 불꽃이 되었고 마침내 1987년 6월 민중항쟁과 7/8/9월 노동자 대투쟁의 거대한 불기둥으로 치솟아오르면서 1980년대를 투쟁과 승리의 시대로 장식했다. (p.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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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오월, 장우
제목: 빼앗긴 오월
작가: 장우
출판사: 사계절
초판 1쇄: 2015년 5월 11일
독서 기간: 12월 9일
추천인: 손현민
소감:12월 11일에 광주 망월동 5.18 국립묘지를 방문하기 전에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아가야 되겠다 싶어 관련 책들을 수소문했고, 손현민이 추천해 읽게 되었다. 한국사 교과서로 배운 한두 줄의 암기 거리가 아닌, 우리 시대의 비극으로, 그분들이 우리에게 남기신 거룩한 유산으로 5.18 민주화 운동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인상 깊은 구절:
작가의 말
어제는 국립5.18민주묘지에 다녀왔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와야지 했는데, 발걸음은 역시나 무거웠습니다.
그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최연소 안장자의 비문 앞에서는 같은 시대를 산 사람으로서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꽃잎처럼 지는 것을 슬퍼하지 마.
지금은 우리가 헤어져 있지만.
좋은 세상 통일된 조국에서.
다시 만나리…….
'지금 우리는, 아니 지금의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생각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연분홍 꽃비가 아스팔트 위로 흩날렸습니다. 영글지 못한 망자들의 넋이 날리는 것만 같아 차를 한쪽으로 세워야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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