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아에게.
지금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너의 표정이 짐작이 간다. 전화도 뜻밖인데 이 난데없는 편지는 오죽할까. 이제는 그만 그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오래된 벗의 편지를 읽어도 좋다.
나의 옛 기억 속의 너는 참, 뜻 깊은 친구였다. 처음에는 그저 만사에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친구인 줄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내가 밤늦게 집에 가다가 심심해서 너에게 전화를 걸고 첫 마디로 '여보세요'가 아닌 '모시모시'라 한 적이 있었는데, 네가 불같이 화를 내더라. 그 날 밤, 다른 우리 나이 또래들은 장난이고 농담이라 치부할 그런 잘못에 분개하는 널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우리 또래 중에 이런 깨어있는 생각을 하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 반대로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사소한 말도 함부로 하지 않게 되었고 글을 쓸 때도 단어 한 글자 한 글자 신중히 선택해 적는다. 이렇게, 내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발전의 계기를 준 너에게 깊은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너는 우리 중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고 주변 환경을 포함한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속속들이 꿰차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나에게 이런 큰 교훈을 준 친구가 너라는 사실은 새삼 당연하게 느껴지고, 그러하기에 나는 지금의 네가 무척 궁금하다. 지금 어떤 것에 관심을 두고, 무슨 책들을 읽는지. 또한, 앞으로 네가 꿈꾸는 일은 무슨 일인지 말이다. 본래 나는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에 굉장히 무심한 편이고 친구에 대해서라 할지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지마는, 옛 기억 속의 네 모습을 생각하면 그 궁금증을 참을 수 없기에 이런 식이라도 실례를 범해 물어보고자 한다.
편지를 쓰기 시작할 때만 해도 서두만큼이나 즐겁고 정겹게 쓰려 했는데 처음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문체와 내용이 딱딱해진 점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그런대로 진심은 담긴 것 같아 다행이고, 너는 좀체 잘 웃지를 않았는데, 지금 이 편지를 읽고 있는 오늘을 기념하여 하루에 한 번씩 거울을 보며 바보처럼 웃는 연습을 하도록 하자.
5월 2일 2013년
목요일 오후 5시 30분
저녁을 기다리며. 손유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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